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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황희?


청백리 황희? 실상은 '알짜배기' 탐관오리였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3.01.29 13:42 | 수정 2013.01.29 17:12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기사 보강 : 29일 오후 5시 10분]

일부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문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2월이 되면 훨씬 더 많은 인물들의, 훨씬 더 많은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것이다. 이런 경우, 외형상 재산이 많은 공직자에게 검증이 집중되기 마련이지만,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 의외로 문제투성이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청백리 이미지를 유지하며 별 탈 없이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의외로 '알짜배기' 탐관오리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주인공은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로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이다. 그는 실상은 '알짜배기' 탐관오리였다.

이리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황희의 초상화.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일반인 차림으로 황희 정승의 집을 방문한 세종대왕이 그의 청빈한 삶에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일국의 정승이 집에서 멍석을 깔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밥상에 누런 보리밥과 된장에 고추밖에 없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말고,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황희의 모습은 정반대다. 이렇게 지저분한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대명사로 불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 세종실록 > 에는 모친상 중의 예법 위반으로 비판을 받은 황희가 세종의 만류를 무릅쓰고 좌의정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소개한 뒤(A), 황희의 부정부패를 노골적으로 고발하는 내용이 나온다(B).

여기서 A부분은 세종 당시의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고, B부분은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 세종실록 >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추가된 내용이다.

< 세종실록 > 을 편찬할 때 사관들 사이에서는 황희의 행적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일부 사관들은 황희의 비행을 폭로하고, 나머지 사관들은 "처음 들어본 이야기"라며 "설마 그랬겠냐?"며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황희의 부정부패를 기록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해서 추가된 것이 B부분이다.

B부분에 따르면, 황희의 별명은 '청백리 재상'이 아니라 '황금 대사헌'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황금 검찰총장'이었다. 그렇게 불린 것은 황금처럼 빛나게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 세종실록 > 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익정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다. 둘 다 승려인 설우로부터 금을 받았다. 그때, 사람들은 그들을 '황금 대사헌'이라 불렀다."

대사헌이 된 뒤 승려로부터 황금을 뇌물로 받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다. 물론 이 별명은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회자됐다. 대부분 사람들은 황희를 청렴한 인물로 인식했다.

황희의 비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고 < 세종실록 > 은 말한다. '형옥을 팔았다'는 것은 형사사건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재판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도 재산을 취득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 "재산 형성과정이 불투명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자신이 벌어들인 월급에 비해 너무 많은 재산을 보유한 경우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다.

황희도 그런 의혹을 받았다. 노비가 재산으로 취급되던 그 시절에, 황희는 "어떻게 저렇게 많은 노비를 거느릴 수 있을까?"라는 의혹을 받았다. 위 날짜의 < 세종실록 > 에 따르면, 그가 아버지 및 장인으로부터 물려받은 노비는 얼마 되지 않는 데 비해, 관료가 된 이후에 보유한 노비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의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428년 당시, 황희는 44년째 근무한 베테랑 관료였다. 이런 장기 근무자가 많은 노비를 보유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황희의 경우에는 44년간 받은 봉급을 감안한다 해도 너무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의혹을 받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천 명이나 2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하면 '노비를 꽤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황희가 보유한 노비 숫자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만약 몇 십 명 정도를 보유했다면 "근무 연수에 비해 노비가 너무 많다"란 말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천 명에 가까운 노비를 보유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특경비(특정업무경비)를 갖고 재테크를 잘한 덕분에 그렇게 많은 노비를 모았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지지 않은 황희의 비리



조선시대 노비의 모습.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황희의 비위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한 편의 기사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비리 중에서 '센 것' 하나만 더 소개하고자 한다.

위 날짜의 < 세종실록 > 에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맞섰던 박포란 사람의 아내가 등장한다. 박포의 아내는 황희의 노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황희의 수노(우두머리 노비)가 이 사실을 포착하자, 박포의 아내는 수노를 죽인 뒤 시신을 연못에 버렸다. 여러 날 뒤 시신이 발견됐고 범인도 밝혀졌다.

박포의 아내는 어디론가 숨어야 했다. 그는 가장 확실한 은신처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사법당국은 물론이고 황희의 노비들이 자신을 추적하는 상황에서 그는 황희의 집 정원에 있는 토굴에 숨기로 결심했다. 범인이 설마 황희의 집에 숨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이곳에서 수년간 숨어 살다가 당국의 수사가 종결된 다음에야 다른 곳으로 떠났다.

박포의 아내를 두고 "배포가 대단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배포가 대단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여성을 숨겨준 황희가 훨씬 더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황희가 그저 동정의 눈빛으로 숨겨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탐욕의 눈빛으로 그 여성을 숨겨주었다. 숨겨주는 조건으로 토굴에서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 같은 데서 황희의 청백리 행적을 읽은 사람들은 이런 내용이 쉽게 믿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동화책이나 신문 칼럼은 역사학적 고증 없이 민간의 이야기에 토대를 둔 것이므로 크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게 지저분하게 산 사람이 어떻게 청백리의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라고 말이다. < 세종실록 > 은 그가 이미지 관리를 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안을 의논하거나 자문에 응할 때에 언사가 온화하고 단아하며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기 때문에 임금(세종대왕)에게 중후하게 보였던 것이다."

황희의 부정부패가 살아생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생전에도 비위 사실이 문제가 된 적이 많았지만, 그는 세종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이나 비판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이 황희에게 "내 아들을 부탁한다"고 당부했기 때문에, 세종대왕도 그를 가벼이 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황희는 정세판단 능력이 기민하고 업무수행능력이 탁월했으며 무엇보다도 주군의 심리를 잘 간파했다. 이렇게 쓸모가 많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태종이나 세종은 그의 결함을 가급적 덮지 않을 수 없었다.

고위공직자 검증이 더 철저해야 하는 이유



황희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세종 10년 6월 25일자(1428년 8월 6일) < 세종실록 > . 오른쪽 첫번째 줄은 황희를 '황금 대사헌'으로 지칭하는 부분이고, 두번째 및 세번째 줄은 황희가 간통범 및 살인범인 여성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조건으로 수년간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부분이고, 네번째 줄은 황희가 "정무를 담당한 여러 해 동안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았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과 황희가 모두 세상을 떠난 뒤 < 세종실록 > 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용기 있는 사관들의 노력에 힘입어 황희의 비리가 실록에 기록될 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구한말까지도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다. 실록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십 년도 되지 않는다. 사정이 이랬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된 황희의 부정부패는 세상에 쉽게 알려질 수 없었다. 그래서 최악의 탐관오리인 그가 최상의 청백리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간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한 노년의 공직자가 단 며칠간의 인사청문회를 계기로 불명예 퇴진하는 예가 종종 있다. 자기가 저지른 일을 뻔히 알면서도 청문회에 나가는 것은 막판에 자신의 욕심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파멸을 자초하는 셈이다.

황희도 정승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는 고도의 이미지 관리를 통해 자신의 파멸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우리가 인사청문회 제도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면, 탐관오리를 청백리로 떠받든 조선시대 사람들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황희처럼 겉보기에 좋아 보이고 깨끗해 보이는 인물일수록, 더 강도 높은 검증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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